札幌、20年ぶり、森彦・円山茶寮、を巡りつつ、NZ・韓国、国は違えど、”老い”は、次世代への松明(たいまつ)だと、知らされた事ど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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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版エルランの見た夢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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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に言ったのか、定かではないが、私は、2023年の3月の初めから、札幌に、住み始めている。

韓国にいた時の事だ。泗川に住んでいる一番上の姉が、母と私と昼食を一緒に食べるために週に一度、車で走ってきた。

私たちが持つ小さな集まりのようなものだった。 変化があるとすれば、父親も、最近出席するということだった。

両親が年を取っているから、少しでも、会おうという意図から始まった。

もちろん、いろいろな理由で中断されたこともあったが、集まりを再開した。

姉は、遠いところから運転をしてくるから大変だろう。

コロナの期間中にうちの家族は、次々と、長兄を手術後に、そして事故で1番目の姉の旦那さん、

つまり義兄を 、ICUに入った後、まともに顔も見ずに、あの世に送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突然の死で大変だったが、今はなんとか乗り切っていると思う。 各自の場所で、それぞれの状況のなかで。

そしてもうひとつ変わったのは、私がもう、その集まりに参加できないということだ。

しかし今も、一番上の姉は自分の痛みもありながら、昼食を一緒に食べるために、一生懸命車で両親を訪問している。

そんな事を考えていたら、もうひとつの記憶が、甦ってきた。

NZにいた時、ヒラリーの母親は療養病院にいた。体をうまく支えられず、誰かの助けが必要な状態であり、

ヒラリーは仕事を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ヒラリーはいつも週末に、約30分の距離にある療養病院を訪れた。

私にも一緒に訪問しようと提案して、行ったことがある。 屋根の尖った小さな療養病院だった。

ヒラリーは彼女の母親に、私を紹介してくれた。私が過ごしている部屋が、昔ヒラリーの息子アレックスが、

使っていた部屋のようだった。

ヒラリーの母親が私を認識したかどうかは、実は分からない。 しかし、ヒラリーは、話し続けた。

韓国から来ていて、verycleverという言葉を言ってくれた。

私はヒラリーの英語をすべて理解できなかったが、彼女は私がすべて理解していると思ったようだった。 困った。

病院訪問後、彼女は私を家まで送ってくれて、夕方アイリッシュクラブの準備のために、デべンポートに行った。

週末にはたまに買い物に、ショッピングセンターに、一緒に行ったりもした。

ヒラリーの前の家にマーガレットという老婦人が住んでいた。

当時の彼女の年齢は70代、いやそれ以上かもしれない。 ヒラリーの母親と友達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

初めてここに到着し、私の体調が少し良くなると、ヒラリーがマーガレットの家に、連れて行って紹介してくれた。

彼女の家には2人の日本人が下宿しており、黄金色のレトリバーも一緒にいた。

私を歓迎しながらクッキーとお茶をもてなしてくれたし、いろんなことを話したりもした。

しかし、私は彼女の言うことを聞き取るのがとても大変だった。 彼女はジョークが好きなようだった。

発音もあまりにも英国式で、冗談もあまりにも英国的なジョークだった。

私が、ニュージーランドを去る数日前に、彼女はすでに天国に行ってしまった。 

マーガレットは独身だった。マーガレットの面倒を見てくれた日本人下宿生が彼女の養子になったと言った。

東洋人下宿生が養子になることが、たまにあった。

ヒラリーの母親は、ニュージーランドという国に移民して生計のために一生懸命働いたはずで、

自分の孫たちも可愛がり、絵もたまに描き、マーガレットと談笑し、この家で暮らしたのだろう。

それは私たちの両親の世代も同じだっただろうし、今私たちが生きている姿とも似ているだろう。

そして私たちの人生には絶えず人々がいる。

私たちはおそらく年をとって悲しいのではなく、時間を振り返った時の後悔のために悲しいのだろう。

だから今この瞬間、最善を尽く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もしれ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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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을 때 사천에 살고 있는 큰언니가 엄마와 나랑 점심을 같이 먹기 위해 일주일에 한번 차로 달려왔다.
우리들이 가지는 작은 모임 같은 것이었다. 변화가 있다면 아버지도 최근에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나이가 들어가니 자주 만나자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로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모임을 다시 시작했다.
언니가 먼 곳에서 운전을 해서 오니 힘들 것이다.
코로나 기간 중에 우리 가족들은 오빠를 수술 후, 그리고 사고로 큰형부를
ICU에 들어간 이후 제대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보내야했다.
갑작스러 죽음으로 힘들었지만 지금은 잘 이겨 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그리고 변한 것은 내가 이제 그모임에 참석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큰언니는 자신의 아픔도 있으면서 점심을 같이 먹기 위해 열심히 차를 몰아 부모님을 방문하고 있다.

힐러리의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있었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고 힐러리는 일을 해야만 했다.
힐러리는 항상 주말에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요양병원을 방문했다.
나에게도 같이 방문하자고 제안을 해서 간 적이 있다. 지붕이 뾰족한 작은 요양 병원이었다.
힐러리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나를 소개시켜 주었다.
내가 지내고 있는 방이 옛날 힐러리 아들 알렉스가 썼던 방인 거 같았다.
힐러리 어머니가 나를 인식했는지는 사실 모르겠다. 하지만 힐러리는 계속 말을 했다.
한국에서 왔으며, very clever란 말을 해주었다.
난 힐러리의 영어를 다 알아듣지 못했는데 그녀는 내가 다 알아듣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난처했다.
병원 방문 후 그녀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 저녁 아이리쉬 클럽 준비를 위해 데본 포트로 갔다.
주말엔 가끔씩 장을 보러 쇼핑센터에 같이 가기도 했다.
힐러리 앞집에 마가렛이라는 노부인이 살고 있었다.
그당시 그녀의 나이는 70대, 아니 그 이상 일수도 있다. 힐러리 어머니와 친구였을 수도 있다.
처음 이곳에 도착해 내가 몸이 좀 나아지자 힐러리가 마가렛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소개시켜 주었다.
그녀의 집에는 2명의 일본인이 하숙하고 있었고, 황금색 레트리버도 함께 있었다.
나를 반기며 쿠키랑 차를 대접해 주었고, 여러가지를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을 알아 듣는게 너무 힘들었다. 그녀는 조크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발음도 너무 영국식이었고 농담도 너무 영국적인 조크였다.
내가 뉴질랜드를 떠나기 얼마전에 이미 그녀는 하늘 나라로 가버렸다.
마가렛은 독신이었다.
마가렛을 잘 돌봐 주던 일본인 하숙생이 그녀의 양자가 되었다고 했다.
동양인 하숙생이 양자가 되는 경우가 가끔씩 있었다.

힐러리 어머니는 뉴질랜드라는 나라로 이민을 와서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했을 것이며,
자기 손주들도 귀여워하며, 그림도 가끔씩 그리며, 마가렛과 담소도 하며, 이집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부모님 세대도 같았을 것이고,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과도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인생에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아마도 나이가 들어 슬픈 것이 아니고, 시간을 돌아봤을 때의 후회 때문에 슬픈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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