ニュージーランドへの旅たちと、フラットで出会った、5人の日本人の想い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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レンタカー

たまに千と千尋の神隠しのOSTを、ユーチューブで聞く。そこのレビューに「一度会った縁は忘れられるのではなく、思い出せない事だ」と、というコメントがあった。

思い出せないという言葉が、私の心に残った。私は果たして何をどれだけ記憶しながら生きているのだろうか。

歳月が経っても、私も今は、もう折れた100歳の年、(韓国でいうところの、アラフィフ笑)。思い出すことが大切になる年齢になりつつあ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気がする。

A地点からB地点に行く間には、A地点のことを覚えているけれども、B地点に着くと何かを忘れ始める。

なぜなら、B地点からC地点に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だ。

しかし、それは決して忘れられたことではないだろう。今日は、私のそんな記憶を一度探してみようと思う。

大学を卒業して、1年ほど職場生活をした後、英語に対する未練と通訳の仕事をしたいという気持ちで、ニュージーランドに行くことにした。すべてが十分に準備されたものはなかった。しかし今行かなければ、行けないという 漠然とした切迫した気持ちの中で、急いで準備をし、飛行機に乗った。13時間という長いフライトは、私にとってとても苦痛だった。弱り目にたたり目で到着したオークランド空港で、私のトランクがシドニーに、向かっているという話を聞いた時は泣きたい気持ちだった。

しかし、到着した下宿でヒラリーは疲れ果てた私を親切に迎えてくれた。

その後、私は時差と疲労でほとんど2日間食事もせずに寝たようだ。

5日後にシドニーに行った私の荷物が無事に、私のそばに戻って来てくれた。すべてが不慣れで不自然で負担だった。あまり外向的でも積極的でもない私の性格が、損をするようだった。ランゲージスクール到着初日には、クラスを決める筆記テストがあった。塾長の米シカゴ出身のモーリンと 総括的事務を担当する香港出身のパトリックとの人事、そして学校紹介と施設物使用と説明を聞いた。私は今や肌の色が違う人と言語が違う人たちと、ここで暮らさなければならない 。

その当時、韓国には外国人が多くなかった時代で、私が韓国で経験した外国人は大学時代に絵画の授業をされたモニカ修道女しかいなかった。

ヒラリーの家には、いつも、私ともう一人の下宿生がいた。

私がヒラリーの家に居る間に、5人の日本人下宿生が滞在し、そして去っていった。普通学校は、ダウンタウンに位置していて、朝は一緒にバスに乗ったりした。私が初めてヒラリーの家に到着した時に会った、

日本人のトシは、英語が流暢で、年齢は私より上だった。大人っぽくて、ホームステイ生活についていろいろ話してくれた。食事の時間にはヒラリーとも自然に会話し、ヒラリーの影響からかライブにも行ったり、音楽についても語り合った。私はその瞬間完全に排除された感じで、異邦人だった。しかし、それは彼らの過ちではないことをよく知っていた。

kkday

トシはすぐに日本に戻り、ミホがやってきた。彼女は活発でよく笑った。 積極的に行動し、お酒が好きだった。ツアーガイドの仕事をしたいと言っていたが、彼女なら、それがよく似合うことだと思った。ミホがヒラリーの家を出た後、 たまにクイーンストリートで偶然会うと、嬉しそうに手を振ってくれた。同じ場所にいる時より偶然会う時、私たちはもっと情が湧く。

ミホが行って、東京からハンサムボーイがやってきた。 ビールが好きで部屋で一人で缶ビールを飲んだりしていた。恥ずかしがり屋の性格だった。 しかしニュージーランドは、あまり面白くなかったようだ。後で聞いた話によると、彼は3か月後に東京に戻ったという。ニュージーランドは自ら楽しみを見つけなければならない国だ。何もしなければ、何も得られない、不思議な国だ。でも、だから私には、良かった。干渉されない感じ、それが良かった。 東京ボーイが去り、愛がその場を訪れた。

愛は誠実で人を楽にしてくれる性格だった。 ヒラリーの猫のティブルも彼女のことが好きだった。彼女がヒラリーの家を出て、友達とフラット暮らしをすると言った時は,少し寂しかった。

ここでは、間借りして生活する形態を、フラットと言う。普通何ヶ月過ごした後その国に慣れれば 人々はフラットでの、生活を始める。 自然なものだった。人々がこのように行ったり来たりすることが繰り返された。ヒラリーの家でも、学校でも。 そんな小さな別れに慣れようと努力した。

私は映画の中でも、「カモメ食堂」という日本映画が好きだ。「人は誰もが変わっていく。 良い方向に変わってほしい」と主人公が語る。変わったと思うのはおそらく私が変わったからだろう。

そして主人公の言葉のように、良い方向に変わってほし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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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를 유튜브에서 듣는다.

거기 리뷰에 “한번 만난 인연은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라는 코멘트가 있었다.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이 내마음에 남았다.

나는 과연 무엇을 얼마만큼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세월이 흘러 나도 이젠 꺾인 100세의 나이.

기억해 내는 것이 중요해지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불연히 든다.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가는 동안에는 A지점의 것들을 기억하지만,

B지점에 도착하면서 무언가를 잊어버리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B지점에서 C지점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결코 잊혀진 것이 아닐 것이다.

오늘은 나의 그런 기억들을 한번 찾아보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1년 정도 직장 생활을 한 후

영어에 대한 미련과 통역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뉴질랜드에 가기로 결정을 했다.

모든 것이 충분히 준비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가지 않으면 갈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들어 서둘러 준비를 했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3시간이라는 긴 플라이트는 나에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설상가상으로 도착한 오클랜드 공항에서 나의 트렁크가 시드니로 가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도착한 하숙집에서 힐러리는 피곤에 지친 나를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그후 나는 시차와 피로로 거의 이틀을 식사도 하지 않고 잠을 잔 것 같다.

5일 후에 시드니로 갔던 나의 짐들이 무사히 나의 곁으로 와주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고, 부자연스럽고, 부담스러웠다.

그다지 외향적이지도 적극적이지도 않은 나의 성격이 손해를 보는 것 같았다.

랭귀지 스쿨 도착 첫날엔 클래스를 정하는 필기 테스트가 있었다.

학원장인 미국 시카고 출신인 모린과

총괄적 사무를 담당하는 홍콩 출신인 패트릭과의 인사,

그리고 학교소개와 시설물 사용과 설명을 들었다.

나는 이제는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사람들과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 당시 한국에는 외국인이 많지 않았던 시대였고,

내가 한국에서 경험한 외국인은 대학시절 회화 수업을 하셨던 모나카 수녀님 밖에 없었다.

힐러리 집에는 나와 또다른 한명의 하숙생이 있었다.

내가 힐러리 집에 머무르는 동안 5명의 일본인 하숙생이 머물렀고 떠나갔다.

보통 학교는 다운타운에 위치해 있어 아침엔 같이 버스를 타곤 했다.

내가 처음 힐러리 집에 도착했을 때 만난 일본인 토시는 영어가 유창하고, 나이는 나보다 위였다.

어른스러웠고, 홈스테이 생활에 대해 여러가지를 얘기해 주었다.

식사 시간에는 힐러리와도 자연스럽게 대화했으며,

힐러리의 영향 때문인지 라이브도 가곤 해, 음악에 대해서도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그 순간 완전히 배제된 느낌이었고,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토시는 곧 일본으로 돌아 가고 미호가 왔다.

그녀는 활발하고 잘 웃었다.

적극적으로 행동했고, 술을 좋아했다.

투어 가이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녀와 잘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미호가 힐러리 집을 떠난 후에

가끔씩 퀸스트리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면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같은 곳에 있을 때보다 우연히 만나게 될 때 우리는 더 정다움을 느끼곤 한다.

미호가 가고 도쿄에서 핸섬 보이가 왔다.

맥주를 좋아해 방에서 혼자 캔맥주를 마셨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뉴질랜드를 별로 재미없어 한거 같다.

뒤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그는 석달 후에 동경으로 돌아 갔다고 한다.

뉴질랜드는 스스로가 즐거움을 찾아야 하는 나라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이상한 나라이다.

그래서 나는 좋았다.

간섭 받지 않는 느낌, 그것이 좋았다.

도쿄 보이가 떠나고 아이가 그 자리를 찾아왔다.

아이는 성실했으며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성격이었다.

힐러리 고양이 티블도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가 힐러리 집을 떠나 친구들과 자취를 한다고 했을 때는 약간 쓸쓸했다.

자취를 플랫이라고 여기에서 말한다.

보통 몇달이 지낸 후 그 나라에 익숙해지면

사람들은 플랫 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왔다가 떠나가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힐러리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러한 작은 이별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나는 영화 중에 갈매기 식당이라는 일본 영화를 좋아한다.

“사람은 누구나가 변해 간다.좋은 방향으로 변해가면 좋겠다”고 주인공이 말한다.

변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마도 내가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 말처럼 좋은 방향으로 변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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